직무가 뭐에요? 무슨 일해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흔히들 묻는 말인데요.
저에게 대답하기 망설여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도 제 직무가 뭔지 모르겠거든요.
보안 전문가
시작은 보안 전문가(화이트해커)였습니다.
아, 보안 전문가 일을 했다는 건 아니구요.
처음 목표로 했던 직업이 보안 전문가였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군인 시절.
반복되는 사무 업무를 피하고자 밤을 새우며 엑셀을 공부해서 마침내 자동화로 반복 업무를 없앴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자동화 엑셀 파일이 제 자식 같기도 하고 보물 1호 같은 마음에, 기어코 개발을 공부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쁜 마음을 먹고 말았습니다.
그 첫 시작이 가장 멋있어보였던 화이트해커였던거죠.
"해커라니! 그것도 해커를 잡는 해커라니!" 같은 가벼운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야 어쨌든 기초부터 다져야겠다는 마음에 기초 관련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기초를 배우는 건 좋지만, 주변에 관련해서 물어볼 사람이 1도 없었던 나머지 너무 근본으로 가버렸던 건데요.

- 운영체제(공룡책)
- 시스코 네트워크
- 칼리 리눅스
- 뇌를 자극하는 윈도우즈 시스템 프로그래밍.. 등등
프로그래밍 지식이 전무하던, 심지어 코딩이라고는 C로 Hello World나 피라미드 찍기를 손코딩하던 시절(*을 손으로 한땀한땀 그렸습니다) 프로세스 통신, 뮤텍스 같은 지식이 나오는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도 의지는 대단했던 것이 2년 동안 거의 매일 책을 읽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현재 머릿 속에 남아있는 지식은 얼마 없습니다.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전혀 모르는 내용을 들으니 기억이 날 리가 없겠죠.
다른 분들은 ChatGPT에게라도 공부 방향성을 물어봅시다 🥲
2년이 지나 전역한 직후, 기초를 쌓았으니(실제로 쌓지는 못했지만요) 드디어 해킹을 배워야지! 싶어서 해킹 동아리에 어렵게 들어갔는데요.
그리고 2개월 만에 탈퇴하고 꿈을 접게 되었습니다..
공부나 취업 방향성을 묻고자 해킹 동아리 선배, 컴공 교수님, 보안 스타트업 대표님 등 열심히 연락해서 면담을 했던 결과,
모든 분들이 보안 업계의 소수 1%만 살아남는 험난한 현실을 알려주며 포기하는 것을 권유해주셨기 때문인데요.
지금 생각하면 준비한 기간에 비해 너무 빨리 포기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 때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 같습니다.
데이터 분석가
나의 지난 2년이 사라진 것 같은 허망한 마음에 전공(경영학과) 교수님들을 찾아가서 열심히 면담을 했었습니다.
그 중 MIS(경영 정보 시스템)에서 데이터 분석을 전공으로 하시는 교수님께서 코딩을 필요로 하는 데이터 분석은 어떻냐고 제안을 주셨고,
저는 조언을 받아들여 분석가의 길로 전향하게 되었습니다.
신생 데이터 분석 동아리에 들어가서 같이 운영과 스터디도 하고,
ML 기법을 이해하기 위해 통계/수학을 공부하기도 하며,
데이터 분석 대회나 공모전에도 열심히 참가했던 나날들을 2~3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도 공부 방향성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ML보다는 AI/비즈니스 전략/오픈소스 기술 등에 좀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요.
졸업 시즌이 다가오고 취업을 해야할 때쯤, 공부해오던 일에 현타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해볼 수 있는 기법들(xgboost, catboost, SVM 등)을 전부 그냥도 쓰고, 튜닝해서도 쓰고, 앙상블도 해본 다음에 성능이 0.1%라도 높은 모델이 제일 좋은 모델이다.
"이런 결론을 내는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 내가 이 작업들에 재미를 느끼나?"
사실 제가 부족했던 문제였지만 어쨌든 이런 현타를 느낄 때 재미로 해봤던 게임 분석이 너무나 재밌었고,
좋아하는 분야인 게임 회사에 애드혹 분석을 위주로 하는 분석가로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장 원했던 게임 회사에서 원했던 애드혹 분석을 실컷 하는 분석가로 취업했습니다!!

(배부른 소리 주의)
실제로 처음에는 너무 일이 재미있었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났을 무렵, 번아웃으로 지친 저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좋은 업무 환경, 재밌고 유능한 동료, 합리적이고 신뢰해주는 상사, 좋은 복지 등 장점은 너무너무너무 많았지만..
단점은 "분석이 재미가 없다" 하나였습니다.
왜 재미가 없냐하면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 분석이 액션으로 이어지는 경험이 적은 것, 정답이 없는 문제 등 많은 변명을 들 수 있겠지만 이유가 중요하진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내게 지금 분석이 재미없고, 재미를 찾고자 이리저리 시도해봤지만 안 됐고, 일이 재미가 없는게 나에겐 번아웃이 올 정도의 문제였다는거죠.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배가 불러도 너무 부른 소리입니다)

데이터 엔지니어
분석은 싫은데, 분석 커리어는 살리고 싶고
개발은 두려운데, 개발은 하고 싶고
이런 그릇된 욕심 속에 선택한 직무가 데이터 엔지니어였습니다.
분석과 개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직무처럼 보였었죠.
(그게 바로 잡부였던 것을..)
조직 내에서 면담을 통해 데이터 엔지니어링 업무를 맡고 싶다고 의견을 제시했었고,
실제로 조직 내의 분석 환경 구성이나 분석 라이브러리 개발, Spark 튜닝 등을 진행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분석가로 2년 구른 사람을 처음 해보는 엔지니어링 업무만 하게 해주는 것도 자원 봉사겠죠.
데이터 엔지니어링 업무를 수행하는 것에 구조적으로도, 실력적으로도 한계를 느꼈습니다.
지금은 주니어라서 괜찮지만 분석가 커리어가 계속 쌓이다보면 커리어 시프트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고,
3개월 안에 이직 or 퇴사라는 배수의 진을 쳐놓고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 결과 다행히 두 번의 연속 이직 끝에 현재 회사로 오게 되었는데요.
분석가로 이직했지만, 신생 데이터 조직이고 엔지니어링 업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면접에서 들어서 기대하고 입사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마주한 것은 가내수공업이었습니다.
팀원들은 로컬 맥북에서 수십, 수백 기가 데이터를 다루고 있었고 큰 데이터를 pandas로 다루다보니 OOM은 일상이었고, 각자 로컬에서 작업해서 합치는 형태로 작업 중이었습니다.
한 번의 데이터 추출은 심호흡이 필요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작업이었구요.

그래서 입사하자마자 데이터 엔지니어링 업무를 자처했고,
분석 환경 구성, 분석/데이터 핸들링 라이브러리 개발, Spark 환경 구성, 데이터 파이프라인 구성 등
1년 6개월 동안은 분석가 보다는 데이터 엔지니어 역할을 위주로 수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세팅이 완료되고나니 팀이 사라졌습니다.

백엔드 개발자
이후 팀을 이동해서 현재는 거의 백엔드 개발자 업무에 가깝습니다.
데이터 엔지니어링도 조금 하고, 분석도 아주 조금 하지만요.
지도와 검색이라는 도메인에 치이고 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Java와 Spring을 위주로, Elasticsearch를 분석엔진이 아닌 검색엔진으로 사용하면서요.
(좌표계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지구를 왜 타원체로 봐..)
그리고 아주 조금의 프론트엔드 업무도 가미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백엔드 개발에 익숙해지고자 사이드 프로젝트에 백엔드로 참여해서 앱도 곧 출시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커리어를 시작 전부터 현재까지 정리해보았는데요.
결국 아직 제가 무슨 직무인지 모르겠습니다.
데이터 분석/데이터 엔지니어/백엔드(+조금의 프론트엔드)까지 더하며 더 정체 모를 잡부가 되었네요.

사실 지금의 상황이 싫지는 않습니다.
너무 찍먹하는 것은 커리어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죠.
다만 아직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업무를 하는 것이 재밌고 좋습니다.
그만 새롭고 싶을 때도 있지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